나의 다리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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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다리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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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3살때 앓은 소아마비로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지팡이를 짚고 다녔었다. 어린 시절에는 몸이 불편한지도 모르고 동네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무수히 넘어져 무릎은 피투성이가 되어 상처가 아물 날이 없었고, 절벽에서 뛰어내리기도 하고 아이들과 총싸움 등을 하며 활동적으로 놀았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지팡이를 잃어버렸다.

찾다 찾다가 할 수 없이 지팡이없이 다녔다. 심하게 몸이 기울어지고 힘들었지만 지팡이가 없어도 그런대로 지낼 만 했다. 그 때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지팡이를 한 번도 짚지 않았다.

만약 그때 지팡이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목발에 의지에 지금까지 살아왔을 것이다. 당장은 도움이 될 지 몰라도 먼 미래를 내다볼 때는 나를 더욱 나약하게 만드는 것이 지팡이였다. 인생에서는 때로는 잃어버려야 더 좋은 것도 있다.

중·고등학교 때는 절뚝거리며 창신동 산동네에서 신설동까지 6년 동안 올라다녔다. 경사는 45도, 거리는 약 1.8km 되는 비탈길을 하루에 한 번씩 올라다니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었다.

아침 7시 30분까지 학교를 가야하는데 6시 30분에 일어나면 아침도 못 먹고 빠른 걸음으로 경사진 길을 내려가야 했다. 그러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아프기도 하지만 지나가는 여학생들에게 너무 창피해 빨리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한 여름에는 교복이 땀에 흠뻑 젖어 집에 도착하면 항상 옷을 새로 갈아입어야 했다. 우산은 없는데 비가 오는 날에는 빨리 달릴 수 없어 비를 고스란히 맞고 터벅터벅 걸어가 집에 도착하면 녹초가 되어 쓰러졌다.

고3 때, 도시락 2개를 싼 가방은 너무 무거워 어떤 날은 다리가 후들거려 한 발짝도 걸어갈 수 없는 날도 있었다.

걸을 때, 엄지 발가락 밑부분에 힘을 많이 주기 때문에 신발은 그곳에 구멍이 잘 났고 엄지 발톱에 너무 힘을 주어 엄지 발톱은 진물어 터져 빠지고 얼마 후 새 발톱이 나면 또 빠졌다.

환절기마다 감기를 앓으며 산동네를 오르내리는 일이 악몽 같았지만 그래도 학교는 다녀야 하는 것으로 알고 6년을 거의 빠지지 않고 등교했다. 학교 끝나고 산꼭대기까지 올라갈 생각을 하면 교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막막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는 끔찍했지만 도망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에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였다. 고통스러운 나날이었지만 고통이 일상이 되니 고통에 면역이 생겨버렸다. 나중에는 견디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처럼 되어 오히려 학교 안 가는 일요일이 달콤한 선물처럼 느껴졌다.

나는 나의 고통을 글을 쓰면서 인내했고 글 쓰는 것이 기쁨이 되면서 고통은 글이라는 마취제에 마취되었다.

고통을 즐긴다는 말이 막연하겠지만 나에게는 이 이야기가 바로 고통을 즐긴 이야기이다.

그렇게 해서 얻은 훈장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 나는 평소에는 체육 시간에 참여하지 않지만 어느 날 체육 점수를 매긴다고 하여 시험에 임했다.

턱걸이로 시험을 본다고 하였다.

나는 턱걸이를 15개를 연속으로 했다. 10개까지는 쉽게 했는데 10개 넘어가면서 팔이 아팠지만 참고 15개까지 했다.

아이들이 환호를 울리고 선생님도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나는 누구나 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턱걸이 10개가 넘으면 잘하는 것이고 15개면 아주 잘하는 것이었다.

다리 힘이 약한 대신 팔을 많이 쓰니 팔 힘이 세진 것이다.

팔 힘이 세지니까 울타리를 팔로만 잡고 넘어갈 수 있었고 물구나무서기도 오래 할 수 있었다.

고통의 대가는 어떤 식으로든 분명히 보상으로 돌아온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니 그때서야 산꼭대기까지 가는 마을버스가 생겨 나는 얼마나 억울해 했던가.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하니 산동네를 오르내렸던 것이 가느다란 다리에 힘을 길러준 것만은 확실하다.

나는 학교 가까운 곳 평지로 이사 가자고 계속 부모님께 졸랐지만 경제적인 여건상 평지로 이사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3년이 지나자 그 때서야 평지로 이사를 왔다.

평지로 이사 오니 너무 좋았고 나는 산이라면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게 되었다. 그 산동네는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산동네를 떠난지 1년 후, 나는 1988년 신춘문예 시조에 당선되었는데 제목이 ‘산을 오르며’ 였다.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다. 은연 중에 내 마음 속에는 산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산을 올라다녔던 것은 고통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고통은 아름다운 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그 시절, 그 추억이 그리워져 자꾸 그 산동네에 가고 싶어 가끔은 차를 타고 올라가 보곤한다.

나의 몸에서 가장 약한 부분인 다리를 나는 사랑한다. 그대도 당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사랑하고 약하다고 너무 감싸지 말고 단련을 시키길 바란다.

나의 다리야 고맙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괴로움이 지나고 간 것을 맛보아라.

고통도 지나고 나면 달콤한 것이다

- 괴테 (러시아 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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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김율도 uldo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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